‘검은 반도체’ 김의 세계로…전남 ‘만호 바다’ 양식장 가보니글로벌 브랜드화로 경쟁력 제고… 김 전문연구소 설립도 서둘러야《 지난달 31일 오전 8시 전남 해남군 송지면 연안 앞바다. ‘만호 바다’라 불리는 곳이다. 3.7t의 작은 김 채취선 청해호를 타고 5분가량 나가자 가지런히 줄을 지어 끝없이 설치된 김 양식 부표가 눈에 들어왔다. 만호 바다는 백만 가구의 어가가 먹고 살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국김생산어민연합회 김중현 해남군지회장은 말한다. 매서운 바닷바람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갔다. 부표 옆에서 작업 중인 선박으로 좀 더 다가가자 폭 210cm, 길이 110m 크기의 김 양식망 아래로 김이 한 가득 매달려 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해 처음 수출 5억 달러를 넘긴 ‘수산물의 검은 반도체’ 김의 신화는 이렇게 차가운 바다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은 10월 말에서 이듬해 3, 4월 해수 평균 온도 섭씨 5∼8도에서 양식된다. 가장 품질이 좋고 비싼 것은 추위가 매서운 1, 2월에 생산된다고 한다. 》 ○ 1위 수산품 참치 바짝 추격하는 김 ▲‘만호 바다’라 불리는 전남 해남군 송지면의 연안 앞바다에서 지난달 31일 어민들이 김이 가득 매달린 망을 양식장에서 걷어 올리고 있다(위쪽 사진). 신안군의 조미김 생산업체인 ‘신안천사김’ 공장에서는 반도체 공장처럼 청결을 유지하면서 미국 코스트코에 ‘커클랜드’ 브랜드로 납품할 조미김을 생산하고 있다. 해남·신안=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해양수산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등에 따르면 지난해 김 수출액은 5억1300만 달러로 전년도(3억5300만 달러) 대비 45.4%가 늘었다. 수산물 단일 품목으로 참치(지난해 6억2500만 달러 수출)에 이어 두 번째로 5억 달러를 넘긴 것이다. 주목할 점은 신장세다. 김 수출은 2007년 6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5억1300만 달러로 8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수출 대상국도 49개국에서 2배 이상인 102개국으로 늘었다. 1위 참치와의 수출 격차는 2008년 2억1800만 달러에서 지난해 1억1200만 달러로 줄었다. 지난 10년간 김의 연평균 수출 증가율은 23.8%로 참치의 8.8%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채널A뉴스 영상 보기 김 수출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부가가치의 거의 100%가 국내 어민과 산업에 돌아간다는 점이다. 참치는 한국의 대표적인 원양어업으로 초기 수산업 발전에 주춧돌이 됐다. 다만 먼바다에서 잡아 선상에서 직접 수출하고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 국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고 한다. ○ 한국 김 수출 경쟁력의 비밀 김은 세계에서 한중일 3국에서만 생산된다. 2016년에 생산된 마른김 약 250억 장 중 한국이 49%, 일본 33%, 중국 18%를 차지했다. aT 구자성 수산수출부장은 “해남과 신안 등 전남의 다도해 지방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바닷물이 섬을 비스듬히 드나들면서 김에 적당한 양분을 제공하고 김에 붙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 주는 등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개펄이 많아 미네랄도 풍부하다. 자연 조건만이 수출 경쟁력을 키운 것은 아니다. 지난달 30일 찾아간 신안군 압해읍 복룡로의 예맛식품 산하 ‘신안천사김’ 가공 공장이 의문의 일부를 풀어줬다. 이 업체는 2012년부터 미국 코스트코에 ‘커클랜드’ 브랜드로 조미김을 공급하고 있다. 공장 내부를 창문 너머로 견학하지만 신발을 갈아 신고, 위생복과 위생모자 그리고 마스크를 착용한 후 손을 씻고 들어갔다. 직원들은 작업장에 들어갈 때 속옷에 작업복 내의를 착용한 뒤 ‘우주복’이라는 별명이 붙은 위생 작업복을 입어야 한다. 작업장 바닥에 타일을 깔고 천장은 스테인리스로 덮어 기름기나 먼지를 깨끗이 청소할 수 있게 했다. 근로자들이 하얀 위생모자를 쓰고 작업하는 공장 내부는 마치 반도체 공장을 보는 듯했다. 생산돼 나오는 제품을 보고서야 조미김 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박우성 수석부장은 “작업장이나 사람에서 나오는 ‘낙하균’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며 엄격한 위생 관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포장된 후 미국까지 배로 운반하는 데 40여 일이 걸리는 데다 고온의 적도를 지나는 만큼 미세한 균이라도 떨어지면 쉽게 증식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하지 않으면 코스트코 납품 조건이나 다른 주요 국제인증을 통과할 수 없다고 박 부장은 말했다. ▲유기농김-할랄김 등 맞춤개발로 세계화 가속 ‘신안천사김’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 영국 일본 호주 등 10개국으로 수출된다. 이 업체는 스낵 제품에 넣는 재료를 아몬드 코코넛 멸치 블루베리 등으로 다양화하는 등 제품 개발로 지난해 425억 원어치를 수출했고 올해는 480억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지난달 31일 찾아간 해남의 마른김 공장 N수산에서는 지하수를 정수기로 정화한 물로 씻어 김 원초를 마른김으로 만들고 있었다. 김 수출이 늘면서 원초나 마른김에 대한 요구조건도 까다로워지고 있는 현장 분위기를 보여줬다. ○ 서양에서 재평가된 ‘검은 수산물 반도체’ 수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김이 미국 유럽 중국 등에서 반찬이 아닌 건강 스낵으로 재평가받고 있어서다. 서양에서 ‘검은 종이’ ‘바다의 잡초’로 무시받던 때가 있었으나 저칼로리 참살이(웰빙) 식품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경쟁국인 중국이 과밀 양식과 낮은 생산 효율, 바다 오염 등으로 생산이 부진하고, 일본은 고령화에 따라 생산량이 크게 늘지 못하는 것도 한국 김 수출의 전망을 밝게 한다. 양식과 마른김, 조미김 및 스낵으로의 2차 가공 그리고 수출 등이 분업화 전문화하면서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김 수출을 늘리는 데 한몫한다. 해수부 노진관 수출가공진흥과장은 “전남 목포 대양산업단지에 980억 원을 들여 해양 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해 관련 업체를 집약화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 김은 수출 증가로 생산을 늘려야 하지만 공급량이 늘어나면 단가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공급량을 스스로 조절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노 과장은 “양식 면허 확대와 단위 면적당 생산량 확대 등을 통해 공급량을 늘리면서 수출 제품을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개선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국내 김 산업이 튼튼해지고 수출 경쟁력이 높아진 데는 2012년 개발된 ‘슈퍼김’(해풍 1호) 개발이 큰 원동력이 됐다. 해남의 한 어민이 기존의 종자 채취용 엽체보다 5배가량 큰 길이 110cm에 폭 87cm의 대형 엽체를 발견해 목포지방해양수산청 당국에 신고한 뒤 신품종으로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배양 개발의 주역이었던 김동수 한국김산업연합회 본부장은 “씨를 한 번 뿌려 한 해 6, 7회 수확하던 것을 12회까지 늘려 획기적으로 생산량을 증가시켰다”며 “공급량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 주마가편이 필요한 김 수출 산업 김 수출 확대는 종자 및 양식 기술 개발을 이끌고 관련 기자재(김 채취선, 건조기, 가공기기 등) 산업이 동반 성장하는 등 전후방 효과도 커 김 산업 육성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2010년 업계 건의로 해수부는 매년 정월대보름을 ‘김의 날’로 지정했다. 각국 현지 식문화 등에 맞춘 ‘수출 목적형 제품 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영·유아용 유기농 김과 이슬람권을 겨냥한 할랄 김이 대표적이다. aT의 경우 지난해 신흥 수출 유망국(동남아 유럽 중남미 등) 진출 시장 개척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6개 권역으로 나눠 시장 개척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우리나라가 제안한 ‘김 제품 규격안’이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의 아시아 규격으로 채택된 것이 시장 개척의 길을 연 계기가 됐다. 백진석 aT 식품수출이사는 “김은 반도체처럼 한국산이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수산물의 반도체”라며 “김 수출 여건이 좋을 때 더욱 생산과 수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 ‘인삼은 6개, 김은 0’… 전문 연구소 한 곳도 없어 한국이 김의 생산과 수출에서 선도 국가지만 과제도 적지 않다. 수출용 김의 영문 표기 등이 일원화되어 있지 않는 등 ‘한국 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상징체계(브랜드 캐릭터 색깔 등)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남군은 ‘해남김’ 브랜드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부가가치가 낮은 마른김 수출 비중을 현재의 40% 선에서 낮출 필요가 있고 조미김 제품도 국가별 상황에 맞게 보다 정교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런 점에서 한국산 마른김을 수입해 다양한 김 스낵 제품을 만들어 한 해 약 1600억 원(2016년)의 매출을 올린 태국 타오캐노이사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이필형 aT 수출사업처장은 말한다. 이 처장은 “태국 시장의 70%를 장악한 이 업체는 김을 튀기거나 타원형으로 말아 구워내는 등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4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한국 업체를 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와 정부는 2024년 10억 달러의 김 수출 목표를 세웠지만 김 전문 연구소가 한 곳도 없어 신품종이나 기자재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경섭 한국김산업연합회 회장은 “인삼이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 제품으로 인식돼 관련 연구소가 5, 6개나 되지만 김은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인삼 제품 전체 수출액은 1억5800만 달러로 김의 30%가량이었다. 신안·해남=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기사 전문 보기